[인디백과] 속이 뻥 뚫리는 강렬한 음악 '록'

 

[라온신문 김소민 기자] 록 음악은 영미권에서 발생해 시대에 따라 새롭게 변화, 재창조됨을 거듭하면서 개성을 드러냈다.

 

록은 미국에서 컨트리 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컨트리 음악에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가 가미된 로커빌리(Rockabilly)가 로큰롤(Rock'n'roll)로 발전하게 됐다. 로커빌리는 ‘록’과 ‘히빌리’의 합성어로 남부 농장의 가난한 백인을 일컫는 속어의 합성어로 쓰인다.

 

노동자 계층의 하위문화를 받아들여 기존의 가치 체계에 대해 반하는 문화를 이뤘고 락 음악 문화에 영향을 받은 10대 집단 문화 또한 기성 세대가 제공한 풍요 속에서 안주하고 그를 모방하려는 것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반문화적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컨트리 음악은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점차 주류 대중음악에 식상해 있던 청중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보수적인 컨트리도 점차 빨라지고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리듬 앤 블루스와의 교류도 빈번해지게 된 것이다.

 

 

1950년대의 록커빌리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인기를 얻는 시기부터 로큰롤이라는 스타일로 용어가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록커빌리의 특징은 기존의 컨트리앤 웨스턴 음악이 악기면에서 밴조, 하모니카, 기타가 주를 이룬데 반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은 전자기타, 베이스 등으로 구성되면서 사운드 면에서도 거칠어졌다.

 

1950년 중반부터 1960년대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는 문화 혁명이 영국 런던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게 됐는데 록 음악이 그 중심이 됐다. 록 음악은 로커빌리에서 로큰롤로 표기돼다 록으로 줄여진 전위음악으로, 로큰롤은 5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발생했으나 영국에서 록으로 용어가 줄어들고 전 세계적으로 이 용어가 확산된 것은 1960년대 초로 보고 있다.

 

 

록 음악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1960년 결성된 영국 그룹 비틀스를 빼놓을 수 없다. 1964년 데뷔한 비틀스는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음악으로 미국을 음반 차트를 휩쓸어 버린다. 이렇게 비틀스가 미국 음악계에 영향을 미친 것을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 부른다. 십대 누구나 쉽게 시도하던 단순한 로큰롤 음악 밴드 중 하나로 출발했지만 이들의 전성기는 포크 록, 싸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 메탈, 펑크, 팝 등의 인접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록 장르 중 귀를 찌르는 듯한 사운드를 헤비메탈이라고 한다. 헤비메탈의 기원은 보통 하드 록으로 불리는 스타일인데 1970년대의 록 음악을 논할 때 주로 프로그레시브 락과 헤비 메탈의 분열을 지적한다. 온건한 프로그레시브 록이 주로 중간 계급의 전유물이었다면 헤비메탈은 폭주와 비행을 일삼는 노동자 층의 전유물이었다. 메탈은 고음의 샤우트 창법에 큰 드럼 거친 금속성 사운드가 특징이고 사이키델릭 록과 브루스 록의 혼합으로 고전적인 메탈 장르다.

 

 

초기 헤비메탈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는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등이 있다. 헤비메탈을 그 악기나 창법에 따라 글램 메탈, 데스메탈 등으로 나뉘는데, 글램 메탈에는 ‘머틀리 크루’, 데스 메탈에는 ‘슬래이어’가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손꼽힌다.

 

펑크는 어떨까? 펑크라하면 록이 변화한 장르로 일관된 흐름으로 형성된 곳으로는 뉴욕이 있다. 여기에 60년대 중반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실험적 밴드가 활동했고 이들은 뉴욕 펑크의 모태가 됐고 뒤이어 72년 밴드 ‘뉴욕 달스’는 글램 록과 펑크에 가교 역할을 했다. 펑크의 태동에 대해 언급할 때 미국이냐, 영국이냐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있지만 폭발적 인기 확산 지역이 영국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펑크의 특성으로는 새로운 질서를 위한 파괴적 행위, 반 지식주의자이며 예술 파괴주의자들이었다. 기성세대와 미래에 대한 좌절로 허무주의를 추종했다. 살아있는 닭의 머리를 물어뜯었던 이기팝, 면도칼로 자신의 몸을 자해한 뒤 무대에 오르는 시드 비셔스 등과 같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정상적인 것들에서의 일탈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후 펑크는 그룹 '섹스 피스톨스'에 의해 전성기를 맞게 되고 매우 실험적인 것이 특징이다.

 

 

80년대에는 미국의 시애틀에서 생긴 ‘시애틀 록’이 잠깐 유행한다. ‘시애틀 록’은 하드 록과 펑크를 접목시킨 특이한 사운드로, 나아가 60년대 사이키델릭 사운드까지 더한 자신들 만의 개성을 표출한 장르다.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너바나’가 있으며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시애틀 록과 비슷한 장르가 사랑받게 되는데 훗날 평론가들은 이를 ‘얼터너티브 록’이라고 이름 짓는다.

 

■ 국내 록 음악의 역사 

 

해외에서 시작된 장르인 만큼 한국 록 음악의 시작은 미8군 무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 미 8군 무대에서 한국의 연주자들은 ‘빅쇼’라는 15인 정도의 스윙밴드 악단에서 활동했다.

 

기타리스트 김홍탁은 미8군에서 알게된 드러머 윤항기와 ‘키보이스’라는 5인조 밴드를 1963년 결성한다. 신중현도 1960년대에 들어 키보이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애드포’라는 자신이 생각하는 소규모 5인조 밴드를 결성해 1963년을 한국 록 음악이 탄생한 해가 된다.

 

 

‘키보이스’, ‘애드포’ 등 밴드는 1960년대 말에서 70년 대 초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동심 ‘라이브 음악 살롱’에서 정기 공연,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 청평 록 페스티벌과 같은 대규모 야외 공연 등을 통해 젊은이들이 사랑을 받았다. 1970년에 들어서는 고고춤의 유행을 타고 밴드가 출연하는 ‘고고장’이 번창하면서 록음악은 ‘청년문화’와 ‘밤문화’를 아우르며 대중음악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했다.

 

 

하지만 1970년 8월에 시작한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초였고 자유로운 표현을 하는 사이키델릭 히피 문화에 영향을 받았던 밴드들은 일차적인 단속의 대상이 됐다. 끊임없는 단속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신중현과 엽전들’, 밴드 ‘검은나비’는 음반 판배량 1위, 2위를 다투며 신중현의 ‘미인’은 가요 순위 1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히트곡이 됐다.

 

퇴폐 문화 단속, 대마초 파동 등으로 한국 록의 간판 스타였던 신중현은 구속 수사, 활동 정지는 물론이고 사랑을 받았던 ‘미인’을 비롯해 많은 히트 곡들은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 였다. 이들은 문화정책으로 소멸된 록 정신을 되살린 한국 록의 자존심이었고 한국적인 록과 포크가 합쳐진 음악을 선보이면서 이후 헤비메틀의 시대가 올 때까지 ‘록 마니아’층을 두텁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80년대 중반 부터는 들국화, 시나위, 부활, 백두산 등 헤비메틀의 시대가 도래한다. '신중현과 엽전들' 이후 슈퍼밴드로 불리는 들국화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과거 김민기, 신중현으로 대표되던 포크와 록의 계보를 한데 모아 80년대 포크와 록이 공존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헤비메탈 1호 밴드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시나위'는 신대철의 힘 있는 기타 연주와 임재범의 샤우팅 창법으로 영국의 뉴웨이브 헤비메틀 사운드를 재현해냈고 한국 록을 이끌어가는 주축 밴드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대에는 댄스 아이돌 문화가 떠오르면서 록음악이 주춤하는 시기를 맞는다. N.EX.T, 윤도현, 김경호 등 쟁쟁한 신인 록 가수가 등장했지만 당시 대중음악계의 주류를 이뤘던 발라드, 댄스 뮤직에 뒤쳐져 큰 사랑은 받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에서는 2세대 헤비메탈 밴드를 비롯해 모던 록 밴드가 등장하게 된다. 2000년대 중반에 터진 ‘알몸 사건’ 전까지 '삐삐밴드'를 시작으로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펑크 록 무브먼트를 주도하며 꾸준하게 사랑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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