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밸류업, 세제 인센티브가 남긴 것

 

일본 도쿄증권거래소가 2024년 1월부터 매달 공표하는 명단에는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계획을 내놓은 상장사들의 이름이 실린다. 공시를 마친 기업과 아직 검토 중인 기업이 나뉘어 올라가는데, 어느 쪽에도 들지 못한 회사는 명단에 아예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잘 보이도록 만들어진 문서다.

 

명단의 요건은 해마다 촘촘해졌다. 2025년 1월부터 '검토 중' 상태에 6개월이라는 시한이 붙어 그 안에 실제 공시로 넘어가지 못하면 이름이 빠지고, 그사이에도 검토가 어디까지 왔는지 설명해야 한다. 올해 들어서는 기업지배구조보고서에 적은 세부 내용까지 명단에 딸려 붙었고 4월에는 요청 자체를 갱신했다. 2023년 3월 첫 요청을 낸 뒤 3년 넘게 매달 같은 문서를 내면서 요구 수준을 단계적으로 높여온 것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프라임 마켓의 공시율은 검토 중인 기업까지 합쳐 93%에 이른다. 그러고도 도쿄증권거래소는 형식적으로 참여한 기업들을 실효적인 계획 쪽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올해 과제로 남겨뒀다.

 

거래소가 요청서에 적어둔 문장 하나는 지금 읽어도 날카롭다.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가 수익성 개선에 유효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그것만 쓰거나 일회성 대응으로 문제를 덮기를 기대하지는 않으며, 자본비용을 넘어서는 수익성을 꾸준히 내는 근본적인 노력을 바란다는 대목이다. 서류 한 장 접수하고 끝내는 방식은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 열린 회의가 하나 있다. 2024년 12월 26일 오전 한국거래소 19층 회의실에 김병환 당시 금융위원장과 정은보 거래소 이사장,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이 앉았고 삼성전자와 KB금융지주, HD한국조선해양, 감성코퍼레이션 임원들이 마주 앉았다. 그때까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낸 상장사가 87곳, 코스피 시가총액 기준으로 43%였다. 금융위원장은 밸류업 정책을 일관되게, 끈기 있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날 상장사들이 모은 의견은 배포된 자료에 그대로 남아 있다. 보다 적극적인 기업 참여가 이루어지려면 정부가 발표한 참여기업에 대한 세제 인센티브가 조속히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밸류업 세제지원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기재부의 답도 뒤따랐다. 그 요구는 이후 조세특례제한법으로 실현됐다. 배당성향 요건을 갖춘 고배당기업의 주주가 배당소득 분리과세를 받으려면 그 기업이 정기주주총회에서 배당을 결의한 다음 날까지 계획을 공시해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효과는 올해 3월 주주총회 시즌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3월 27일 하루에 109곳, 그 전날에는 72곳이 계획을 냈다. 제도 시행 첫해인 2024년 한 해 동안 쌓인 공시가 92건이었으니 이틀 사이에 두 해치가 밀려들었다. 지난달 말까지 누적 747곳, 시가총액 비중 84.6%라는 숫자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날 회의실에 앉았던 기업들이 이후 무엇을 했는지 따라가 보면 세제가 움직인 범위가 짐작된다. 금융위 자료에서 삼성전자 옆에는 '공시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실제 공시는 15개월이 지난 올해 3월 19일에 나왔고 지금까지 후속 공시가 없다. 간담회 두 달 전 이미 계획을 냈던 KB금융지주는 세 차례, 12월 13일에 공시한 HD한국조선해양은 두 차례 공시를 이어갔다. 거래소 컨설팅을 받던 코스닥 중소기업 감성코퍼레이션은 간담회 당일 계획을 제출했고 이듬해 이행 현황을 다시 냈다.

 

전체 747곳 가운데 632곳이 고배당기업 자격으로 서류를 냈고 605곳은 그 한 번의 공시 뒤로 이행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올해 3~4월에 합류한 542곳 중 재공시를 낸 곳은 세 군데뿐이다. 도쿄증권거래소가 요청서에서 미리 못을 박아둔 그 일회성 대응이 한국에서는 다수가 됐다. 시행 첫해라는 이유로 허용된 약식 공시가 목표 자기자본이익률과 배당성향 정도만 적으면 되도록 설계돼 있었으니 놀랄 결과도 아니다.

 

세금을 유인으로 삼은 제도는 세금을 받아내는 순간 목적을 다한다. 이름을 걸어둔 쪽에서는 다음 달에도 같은 명단이 다시 나오기 때문에 압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2024년 12월 그 자리에서 애널리스트들이 남긴 말도 지금 다시 볼 만하다. 밸류업 정책이 성공하려면 산업정책을 통해 자본수익성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었는데, 정작 그 부분은 채워지지 않은 채 공시 건수만 여덟 배로 불었다.

 

밸류업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상장기업의 자사주 소각 규모는 2023년 4조 8000억원에서 2024년 13조 9000억원, 지난해 21조 4000억원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소각액이 취득액을 처음 앞질렀다. 자본시장연구원 분석을 보면 지난해 코스피 공시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은 11.2%로 미공시기업의 4.1%를 크게 웃돌았다. 다만 이 수치는 공시가 수익성을 끌어올린 증거라기보다 원래 자본을 잘 굴리던 기업이 먼저 계획을 냈다는 뜻으로 읽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2024년에 자발적으로 공시한 기업들의 중위 시가총액은 2조원을 넘지만 올해 3~4월 합류한 기업들은 1304억원이다.

 

성과로 세어온 숫자들도 다시 따져볼 만하다. 공시 기업 수와 시가총액 비중, 지수 상승률 어느 것도 기업이 자본을 더 잘 쓰게 됐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밸류업 지수만 해도 6월 중순 기준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종목이 지수 시가총액의 74%를 차지했다. 저평가 기업의 개선을 유도하겠다며 만든 지수가 반도체 두 종목의 등락을 따라 오르내린다.

 

내년 3월이면 약식 공시가 사라지고 고배당기업도 현황 진단부터 이행 평가, 주주 소통까지 갖춘 계획을 다시 써야 한다. 금융위원회와 거래소가 지난달 29일 내놓은 저PBR 기업 공표제도 세부기준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조치다. 시장별·업종별로 반기마다 주가순자산비율을 매겨 누적 3년간 코스피 하위 25%, 코스닥 하위 10%에 머문 기업을 매년 5월과 11월 첫 거래일에 공표하고 증권사 거래 화면의 종목명에 '저PBR' 태그를 붙이겠다는 내용이다.

 

이달 24일까지 의견을 받고 9월 중 증권선물위원회와 금융위 정례회의 승인을 거치면 11월 2일 첫 명단이 나온다. 도쿄가 이름을 걸어 압박해온 방식을 한국이 뒤늦게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기준안에는 저PBR 개선계획을 담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하면 1년간 공표를 면제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첫 공표의 주가순자산비율 산정 기준일이 10월 22일이니 그날까지 계획을 내면 명단을 피한다. 거래소는 9월 중 기업이 자기 반기별 PBR과 업종 내 순위를 미리 확인할 수 있는 조회 시스템도 연다. 명단에 오를지 확인한 뒤 마감 직전에 서류를 넣는 경로가 제도 안에 그대로 놓여 있는데, 올해 3월 주총 시즌에 벌어진 일이 되풀이될 소지가 여기에 있다.

 

당국도 그 위험을 아는 듯 원인 분석과 목표 설정, 개선계획, 이행평가를 담은 상세 양식을 지침에 규정하고 거래소가 서식 준수 여부를 확인해 면제를 결정하도록 했다. 누적 6년간 하위권에 머문 120곳가량은 계획을 내도 명단에 오른다. 결국 양식의 깐깐함과 면제의 느슨함 가운데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따라 결과가 갈린다. 2024년 12월 그 회의실에서 세제 인센티브를 요구하던 자리에 605곳이라는 숫자를 내다본 사람은 없었다. 10월 22일에 같은 일이 되풀이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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