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 살 때 확인하라던 '집중도 경고등'…러그풀 일당이 먼저 지웠다

금감원, DEX 가상자산 매매 유의사항 안내
소수 지갑이 물량 독식하면 '위험 신호'…분산·순환거래로 따돌려

 

가상자산을 사기 전에 소수 지갑이 물량을 독식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라는 것은 금융당국이 꼽는 대표적인 러그풀(먹튀) 방어 수칙이다. 발행자가 코인을 대거 쥐고 있으면 한꺼번에 내다 팔아 시세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찰이 최근 기소한 첫 가상자산 시세조종 사건에서 범인들은 이 '경고등'부터 미리 꺼버렸다. 지갑 여러 개에 물량을 잘게 나누고 자기들끼리 사고파는 거래를 반복하며 특정 세력에 물량이 몰리지 않은 것처럼 꾸민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15일 '탈중앙화거래소(DEX)에서의 가상자산 매매 시 이용자 유의사항'을 통해 이 같은 러그풀 사기와 유사코인 피해에 각별히 주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금감원이 러그풀의 대표적 위험지표로 꼽은 것이 상위보유자 집중도다. 블록체인 탐색기로 지갑별 보유 비중을 확인할 수 있는데, 소수 지갑이 발행량 대부분을 갖고 있으면 이들이 매물을 쏟아낼 때 가격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금감원이 예로 든 한 코인은 상위 10개 지갑이 전체의 약 70%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분포는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 검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 범인들은 지갑 여러 개에 물량을 나눠 담고, 자기들끼리 코인을 주고받는 순환거래를 되풀이했다. 겉으로는 여러 사람이 코인을 나눠 가진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한 세력이 절반 이상을 쥐고 있었다. 투자자가 탐색기를 들여다봐도 위험 신호를 가려내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둔 셈이다.

 

검찰에 따르면 일당은 한 밈코인 발행 플랫폼에서 약 10억 개의 코인을 찍어낸 뒤 절반 이상을 헐값에 미리 사들였다. 이어 수천 명의 팔로워를 둔 인플루언서를 앞세워 X(옛 트위터) 공식 계정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스레드에 "락업이 예정돼 있다", "수요가 급증한다"라는 허위 호재를 뿌렸다.

 

매수세가 몰리자 코인값은 거래 시작 26시간 만에 1001배로 뛰었고, 일당은 이 틈에 보유 물량을 모두 팔아치웠다. 6000여 명이 코인을 샀는데 이 가운데 256명이 9억원어치 피해를 봤다. 반대로 일당은 1000만원을 굴려 범행 시작 30시간 만에 4억원대를 챙긴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남부지검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부는 지난달 27일 이들을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지난해 7월 시행된 이 법의 사기적 부정거래 조항을 적용한 첫 사례다. 이 사건은 경찰 단계에서 "해킹당했다"라는 진술에 막혀 미제로 남아 있었다. 금감원 가상자산조사국이 조사해 금융위원회 의결을 거쳐 고발했고, 검찰이 발행·유통 구조와 범죄수익을 좇아 규명했다.

 

이런 사기가 DEX에서 잦은 것은 시장 구조와 맞물려 있다. DEX는 중앙 운영자 없이 이용자끼리 직접 거래하는 시장이라서 회원가입이나 본인인증(KYC) 없이 개인 지갑만 연결하면 누구나 코인을 발행해 사고 팔 수 있다. 상장 코인을 걸러줄 심사 주체도, 백서나 유통계획 같은 서류도 없다.

 

코드를 짤 필요 없이 코인을 찍어낼 수 있게 되자 물량이 쏟아졌다. 코인게코에 따르면 지난해 거래된 코인은 2000만 종으로 전년(300만 종)의 일곱 배에 육박했다. 이 중 53.2%는 이미 거래가 끊겼다. DEX의 현물 거래 비중은 2021년 1월 6%에서 밈코인 열풍을 타고 지난해 6월 25%까지 치솟은 뒤 13~15%로 내려와 있다.

 

DEX는 사고가 터져도 피해 구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래가 블록체인에 자동 기록돼 한 번 잘못 보내거나 당하면 되돌릴 길이 없다. 금감원이 집중도 확인과 함께 코인명 대신 컨트랙트 주소(코인 고유 식별번호)로 검색하고, 슬리피지(예상가와 체결가의 차이) 허용범위와 유동성 풀 규모까지 따져보라고 당부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처럼 작정하고 짜인 사기 앞에서는 이런 점검만으로 피해를 다 막기 어렵다.

 

금감원은 “AI 기반 이상거래 탐지·분석 시스템으로 시장을 살피고 있다”라고 밝혔다. 누군가 물량을 미리 사들인 뒤 SNS로 허위정보를 퍼뜨려 시세를 띄우는 정황을 보면 증거를 챙겨 신고해 달라고도 했다.


추천 비추천
추천
0명
0%
비추천
0명
0%

총 0명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