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밝힌 올해 감독업무의 최우선 목표는 금융소비자보호다. 이를 위해 상품 설계부터 판매까지 전 과정을 소비자보호 관점에서 점검하라고 주문했고, 이에 부합하는 KPI 체계도 새로 짜라는 당부가 이어졌다. 감독 패러다임을 '사후 대응'에서 '사전 예방'으로 바꾸겠다는 선언도 여러 번 강조했다. 소비자보호 부문을 원장 직속으로 배치하고 업권별 감독·분쟁조정 업무를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조직도 개편했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본 현장의 모습은 결이 달랐다. 금감원이 최근 금융사에 공람한 '2025년 금융소비자보호 실태평가 사례집'에는 은행·보험·여전·증권 네 업권의 미흡 사례 50건과 우수사례 39건이 담겼다. 단순한 행정 지적으로 보기에는 무게가 있는 내용이다. 그동안 금융사들이 내세워온 소비자보호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굴러갔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흡사례와 우수사례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 이름만 CCO
소비자보호 담당임원(CCO)은 회사 안에서 소비자 편에 서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B은행 CCO는 대형 계열사 CCO를 겸직하느라 일주일에 두세 번만 은행에 나왔다. C캐피탈은 더하다. CCO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출근하면서 경영협의회 같은 중요 회의에 자주 빠졌다. B캐피탈은 또 다른 사례다. 이 회사 CCO는 개인정보보호책임자와 신용정보관리·보호인까지 겸직하고 있었고, 소비자보호부서 인력 6명 중 2명이 개인정보 업무를 함께 맡았다. 본업이 둘로 쪼개진 셈이다.
B생명 사례는 좀 단적이다. 2022년부터 임명된 CCO 4명이 모두 계열사에서 건너왔고, 하나같이 1년 만에 자리를 떴다. 독립성도 전문성도 쌓일 틈이 없다. 이런 자리에서 영업 부서를 향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A은행 CCO는 아예 소비자보호와 무관한 업무를 잔뜩 겸했다. 직책은 있는데 직무는 흐릿하다.
◆ 광고 오타나 고치는 사전협의
상품을 내놓기 전 소비자에게 불리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는 절차가 사전협의다. D은행이 평가 기간 동안 낸 의견은 고작 3건. 그것도 광고 문구 추가나 오타 정정 정도였다. D생명, D증권도 비슷했다. 상품 구조나 불완전판매 위험을 두고 오간 진지한 논의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E카드 사례는 좀 답답하다. 소비자보호부서가 개선을 요청했는데 상품 부서가 별 사유 없이 무시했다. 그런데 미수용 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규정 자체가 없었다. 거부할 수도, 거부당했다고 따질 수도 없다. D캐피탈은 더 근본적이다. 사전협의 절차나 사후관리에 관한 내규 자체가 세부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다. 운영이 부실한 게 아니라 출발선이 비어 있는 셈이다.
C은행은 사전협의 누락 모니터링을 2024년 하반기에야 시작했는데, 매월 확인된 누락 건수가 0건이다. 인력이 부족해 사실상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 시험 보는 사람이 시험지를 만든다
판매 현장이 매뉴얼대로 굴러가는지 점검하는 자체 미스터리쇼핑도 부실했다. H은행은 평가 대상인 펀드·신탁 사업부가 직접 미스터리쇼핑을 주관했다. 실시 기간과 대상이 사실상 새어나간 셈이다. F생명은 한술 더 떠 미스터리쇼퍼가 의심되면 지점장과 함께 평가받도록 권고했다.
광고 심의 쪽도 만만치 않다. F은행은 준법감시인의 최종 심의필 번호를 수정된 최종안이 아니라 수정 전 원본에 찍었다. 절차는 밟았는데 무엇을 승인한 건지가 모호하다. G증권은 반대였다. 광고 심의를 소비자보호부서가 도맡고, 준법감시부서는 결재 도장만 찍었다. 책임 소재가 흐려진다.
◆ 규정은 있는데 시스템이 안 따라간다
매뉴얼과 현장이 따로 노는 사례도 적지 않다. G생명은 내규상 투자성 상품을 판매할 때 적합성 진단을 같은 날 다시 하지 못하도록 못 박아뒀다. 그런데 당일 재실시가 계속 일어났다. 전산에서 막는 식의 기술적 차단 장치를 두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A생명은 더 근본적이다. 소비자보호 내부통제위원회를 1년에 5번 열어야 하는데 그중 4번을 합리적 이유 없이 서면으로 끝냈다. 이사회에 보고도 안 했고, 소비자보호 경영방향이나 KPI 같은 필수 안건 의결도 빠뜨렸다. 회의는 했다는데 회의 같지가 않다.
판매대리점 관리는 더 헐겁다. H생명과 I손보는 GA 같은 판매대리·중개업자에 대한 점검을 서면이나 자율점검 방식 위주로 처리했다. 종이 한 장 받고 끝낸 셈이다. K캐피탈은 위법이나 중과실 소지가 있는 민원이 반복적으로 들어왔는데도 깊이 들여다보거나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신호가 와도 지나친 것이다.
비대면 채널도 사각지대였다. R은행은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정보가 정확한지, 갱신이 필요한지를 들여다보는 체계 자체가 없다. S은행은 비대면 중심으로 영업하면서도 정작 모바일 앱에 소비자보호 포털도, 상품공시실도 만들지 않았다. 검증 체계도 없었다. 점포는 줄이고 앱은 키워가는 흐름인데, 그 안에서 소비자가 받는 정보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 모두 만점인 성과평가
가장 씁쓸한 대목은 성과평가다. M은행은 임원과 대표이사 평가에 소비자보호 지표를 반영하긴 했다. 그런데 기준이 구체적이지 않아 평가 기간 내내 다들 만점을 받았다. N은행도 사정이 같다.
K·L은행은 최대 감점이 1점에 그쳤다. 그런데 일부 위험 상품군에는 오히려 가점이 붙었다. 소비자보호를 한다면서 위험 상품 판매를 부추기는 꼴이다. P카드에선 정도영업을 어긴 영업점이 우수 영업점으로 시상받는 일도 가능했다. Q·R캐피탈은 영업점 평가에 소비자보호 지표가 있었지만, 실제로 감점된 사례는 거의 없다. 평가표는 있는데 평가는 없는 셈이다.
J증권 사례는 결이 좀 다르다. 재무 성과와 따로 가는 별도 성과지표를 만든 점은 좋은데, 그 안에 '사내 고객만족도'라는 항목을 넣었다. 내부 직원이 소비자보호부서를 평가하는 구조다. 영업 부서에 쓴소리 한 번 하면 점수가 깎일 수 있다. 적극적으로 내부통제를 하라는데, 적극적으로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를 만들어둔 셈이다.
◆ 정작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
진짜 보호가 필요한 이들은 어떨까. O생명은 고령층 고객 비중도 높고 TM 비대면 영업 비중도 높다. 그런데 고령자용 표준 스크립트조차 없었다. T은행은 고령 투자자가 원금 비보장 상품에 가입해도 가족에게 손익 상황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운영하지 않았다.
P생명은 장애인 차별 여부를 점검하는 절차가 아예 없다. V캐피탈은 금융소비자보호 교육 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았고, 1사1교나 취약계층 교육 실적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