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은행과 생명보험·손해보험, 여신전문금융회사를 상대로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분쟁조정 신청이 3만 6006건에 달했다. 1년 전보다 55.3% 많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같은 사안으로 거듭 낸 건을 걸러내면 2만 4624건으로 줄어든다. 접수된 세 건 중 한 건이 중복이었다는 얘기다.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신청서 작성 부담이 사라지면서 반복 신청이 늘어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25일 은행연합회와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4개 업권의 올해 1~6월 분쟁조정 신청은 3만 600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만 3175건)보다 1만 2831건 늘었다. 중복·반복 신청을 뺀 실질 신청은 2만 4624건이다. 중복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 23.5%에서 올해 31.6%로 8.1%포인트 높아졌다. 접수 건수는 55.3% 늘었지만 실질 건수 증가율은 38.9%에 그친다.
중복 비중이 가장 가파르게 오른 업권은 손해보험이다. 지난해 24.4%에서 올해 33.4%로 9.0%포인트 뛰었다. 하나손해보험이 대표적이다. 383건을 접수했는데 중복을 걷어내니 109건만 남았다. 중복 비중이 71.5%로, 지난해 30.6%에서 두 배 넘게 올랐다. 서울보증보험도 237건 가운데 96건만 남아 59.4%를 기록했다. 대형사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롯데손해보험 37.4%, 흥국화재 37.3%, 삼성화재 36.1%, DB손해보험 35.1% 순이었다.
생명보험은 18.4%에서 23.0%로, 여신전문금융회사는 12.6%에서 28.1%로 중복 비중이 올랐다. 은행만 38.5%에서 28.7%로 낮아졌는데, 한국씨티은행처럼 접수된 10건이 모두 중복으로 걸러진 곳도 있었다.
업권별 접수 건수를 보면 손해보험이 1만 8090건에서 2만 8776건으로 59.0% 늘어 증가폭이 가장 컸다. 생명보험은 3253건에서 5444건으로 67.3% 늘어 증가율에서는 손보를 앞질렀다. 은행은 711건에서 820건으로 15.3% 늘었고, 여신전문금융회사는 1121건에서 966건으로 13.9% 줄어 4개 업권 중 유일하게 감소했다.
보험업계는 AI 확산을 배경으로 꼽는다. 분쟁조정을 신청하려면 청구 경위와 약관 해석을 둘러싼 주장을 문서로 정리해야 한다. 이 작업을 AI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중형 보험사의 한 CCO(소비자보호 담당 임원)는 "AI를 활용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라며 "서류 작성 부담이 줄면서 접수 문턱이 낮아진 영향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접수 경로도 달라지고 있다. 올해 2분기 손보사 민원 가운데 보험사로 직접 들어온 자체 민원은 1년 전보다 13.8% 줄었지만, 금감원 등 외부 창구를 거친 대외 민원은 25.7% 늘었다. 보험사와 먼저 협의하는 대신 곧바로 감독당국 문을 두드리는 소비자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접수는 급증했어도 소송으로 번진 사례는 그대로였다. 손해보험 소제기는 69건에서 114건으로 늘었지만 신청 대비 비율은 0.4%로 지난해와 같다. 생명보험도 11건에서 12건으로 사실상 변화가 없었다. 은행은 오히려 37건에서 3건으로 줄었다. 지난해 상반기 NH농협은행과 SC제일은행이 각각 8건, IBK기업은행이 7건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신한은행과 케이뱅크, 토스뱅크에서 한 건씩만 나왔다.
여신전문금융업권은 업태에 따라 방향이 갈렸다. 카드사 8곳의 신청은 1052건에서 794건으로 24.5% 줄어든 반면 캐피탈·리스사는 69건에서 172건으로 149% 늘었다. JB우리캐피탈이 5건에서 37건으로, 현대캐피탈이 10건에서 30건으로 늘었고 오케이캐피탈은 지난해 한 건도 없다가 11건이 접수됐다. 분쟁조정 신청이 있는 회사만 공시 대상에 오르는데, 대상 회사도 25곳에서 27곳으로 늘었다.
금융당국은 창구 정비에 들어갔다. 금감원은 지난달부터 자동차 사고 과실비율 같은 단순 민원을 손보협회로 넘겼고, 다음 달에는 직원 불친절 민원 등으로 이관 대상을 넓힌다. 네이버 하이퍼클로바X를 기반으로 한 소형언어모델(SLM)이 분쟁조정 사례와 판례를 학습해 민원 분류와 답변 초안 작성을 돕는 시스템도 가동한다.
다만 접수 건수만으로 회사별 소비자보호 수준을 재단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보유계약 규모와 보험금 청구 건수에 따라 신청이 좌우되는 데다 중복 비중이 회사마다 크게 벌어져 있어 실질 분쟁 규모를 보려면 중복 제외 기준을 함께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