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A씨는 실손보험에 가입하려다 청약서를 앞에 두고 잠시 멈칫했다. 최근 3개월과 5년 이내에 진찰·수술·투약을 받았는지는 묻고 있는데, 10년 전에 앓았다가 완치된 암은 어디에도 적을 칸이 없었다. 이걸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지, 나중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지가 마음에 걸렸다.
이런 경우라면 알릴 필요가 없다. 청약서상 병력은 최근 5년 이내의 진단·치료·수술과 최근 1년 이내의 추가검사(재검사)를 묻는 방식이라, 10년 전 완치되고 최근 1년 안에 재검사도 받지 않았다면 알릴 의무 대상에 들지 않는다. 예외가 하나 있다. 5년이 지나 받은 검사에서 재발 가능성을 통보받았거나 재검사가 필요하다는 안내를 받은 적이 있다면 그 사실은 알려야 한다. 장애인 여부 역시 청약서에서 자주 묻던 항목이었지만 2018년 10월부터 빠져 지금은 고지 대상이 아니다.
원칙은 상법에 있다. 상법 제651조의2는 보험사가 서면으로 질문한 사항을 '중요한 사항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한다. 표준약관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알릴 의무 대상을 아예 '청약서에서 질문한 사항'으로 좁혀놓았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청약서에 있는 항목만 답하면 된다. 다만 청약서에 없다고 무조건 안전한 건 아니다. 계약과 관련해 명백히 중요한 사실인데 알고도 일부러 숨겼다면 고의·중과실로 판단돼 알릴 의무 위반으로 볼 여지가 있다. 청약서에 없는 사실이라도 애매하다 싶으면 청약서 여백에 적어두거나 보험사에 직접 알려두는 편이 안전하다.
청약서에 적힌 항목을 두고도 오해는 잦다. '재검사'와 '계속 치료'의 정의가 대표적이다. 방광염으로 병원을 세 번 다니며 21일 치 약을 받은 뒤 6개월 뒤 소변검사를 다시 한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이 소변검사는 재검사일까. 법원은 앞선 검사 결과에 따라 이어서 받는 검사만 재검사로 본다. 앞선 검사와 관계없이 본인이 불편해서 새로 받은 검사는 재검사가 아니라는 뜻이다(서울중앙지법 2015나67009). '계속하여 7일 이상 치료' 항목도 병원을 일곱 번 갔다는 얘기가 아니다. 같은 원인으로 치료를 시작한 날부터 완료된 날까지 실제 치료·투약받은 일수를 뜻한다. 앞의 방광염 사례는 '계속하여 3일 치료, 21일 투약'에 해당해 이 항목에 '아니오'로 답해도 된다.
일부 병만 빠뜨렸을 때가 오히려 더 골치 아프다. 부친이 통풍·본태성고혈압·고지혈증 등은 청약서에 다 적었는데 만성간염만 실수로 빠뜨렸다가 위암 판정 뒤 계약이 해지된 사례가 있다. 상법과 대법원은 미고지 항목과 실제 발생한 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어도 보험사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본다(대법원 2010다25353). 만성간염이 위암 발병과 직접 연결되지 않더라도 정기 투약을 받고 있던 병을 빠뜨린 이상 계약 자체는 깨질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보험금 지급 여부는 인과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위암과 만성간염이 무관하다는 점을 인정받으면 이미 청구한 암 진단비는 받을 수 있다. 해지에도 시한은 있다. 보험사는 위반 사실을 안 날로부터 1개월, 계약을 맺은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
반면 알리지 않았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결절이 발견됐지만 특별한 치료가 필요 없어 경과관찰만 안내받은 뒤 이를 알리지 않고 보험에 가입한 사례가 있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는 성인 2~4명 중 한 명꼴로 발견되는 흔한 소견이고 실제로 치료·투약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알릴 의무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2013-4호). 진단·치료 없이 '경과관찰' 안내만 받은 검사 결과라면 청약서 항목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또 다른 흔한 오해가 '설계사에게 말했으면 됐다'는 생각이다. 설계사에게는 병력을 다 얘기했는데 "그건 안 적어도 된다"는 안내를 받고 청약서에 쓰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표준약관은 설계사가 사실대로 고지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부실한 고지를 권유했을 때 보험사가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고 정한다. 다만 두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설계사의 그런 안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소비자가 입증해야 하고, 설계사 유도와 무관하게 어차피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을 것으로 인정되면 해지될 수 있다. 병력을 알렸다면 그 대화를 문자나 녹취로 남겨두어야 나중에 다툴 근거가 된다.
정리하면 청약서는 원칙적으로 물어본 것만 답하면 된다. 대신 물어본 항목은 조금이라도 애매하면 빠짐없이 적는 편이 낫다. 특히 정기 투약이나 정기 검진을 받고 있는 병은 빠뜨렸다가 나중에 계약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설계사의 안내를 그대로 따를 때도 대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습관이 소비자를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